조혜수
2026-01-26
원문 보기 (일본어) : 記憶の前でーー大阪 鶴橋・西成 フィールドワーク・レコード
본 텍스트는 원문으로부터 번역된 것으로 번역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작년 여름, 일본 최대 규모의 한인 상권인 오사카의 츠루하시에 방문했습니다. 니시나리와 그곳에서 오래 활동해온 코코룸에 방문하게 되면서 들린 것입니다. 텐노지를 중간에 두고 대각선으로 마주하고 있는 니시나리구와 이쿠노구. 오사카에 오면서 이 지역에 들리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반면, 오사카에 처음 간 것은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였습니다. 부산항에서 페리를 타고, 쓰시마, 시모노세키, 세토내해를 거쳐 오사카항으로 들어왔습니다. 배로 왁자지껄 친구들과 바다를 건너면서 방에서는 신라면을 먹었답니다. 낮에 출발해서 하룻밤 밤을 자는 일정이었고, 배 안에서 보는 바다가 얼마나 깜깜하고 깊던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그리고 눈을 뜨니 도착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이 경로가 100년전에도 똑같이 이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간 츠루하시의 코리아타운 자료관에서 같은 경로의 지도를 보았거든요. 아마 100년도 더 된 경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의 증조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해방 후 부산으로 돌아온 것도 아마 같은 경로입니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를 통해 세토내해로 들어와 오사카항에 도착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조선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기에 일본으로 이주했습니다. 일을 하러 갔다고는 들었는데 그 외에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는 광부였습니다. 나의 외할머니는 오사카를 거쳐 다다른 교토의 산중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 또한 그 외의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해방 후 조선인 귀국선을 타고 부산으로 돌아온 것이 할머니가 스무 살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땅에 ‘돌아가는 것’은 가능할까요?)
외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정확히 한 달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외할머니와 나는 어떤 시간성도 물리적으로 공유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들어온 할머니의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고, 그래서 츠루하시의 코리안타운 자료관에서 해도를 발견했을 때 기뻤습니다. 할머니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내가 일본어를 말할 수 있게 되면서인 것 같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어릴 적 카이단(한국어로 계단)이 부산 사투리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몇 가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고 그것은 일본어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 중 제일은 할머니가 시장의 두부 파는 아주머니와만은 일본어로 꼭 대화를 했다는 외삼촌의 어릴 적 기억입니다. 할머니는 부산으로 돌아왔을 때, 한국어를 하나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시절 할머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나 뿐입니다. 할머니는 없지만요.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외삼촌은 종종 구글 맵에 100여년 전 할머니가 태어난 주소를 검색해 로드뷰를 봅니다. 그 주소는 할머니의 여동생이 아주 옛날에 알려준 것입니다. 할머니의 여동생도 오래 전에 돌아가시고 이제는 없습니다. 어느 날은 외삼촌이 말했습니다.
“교토시의 자료에 접근 하려고 했는데 해외라 그런지 들어가볼 수가 없더구나. 거주 인구 명단이나 승선 기록 같은 데서 이름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일본은 옛날 기록도 남아 있는 나라이니까.”
나는 할머니의 일본 이름을 물어보았습니다.
“김씨니까 아마…. 카네 어쩌고가 아닐까.”
이름을 모르는 기억을 찾는 것은 가능할까요?
남겨진 것들
이쿠노구의 츠루하시역에서 내려서 10분이면 코리안 타운에 닿습니다.
해방 전부터 조선인들의 집단거주지로 유명했던 이곳은 과거 이카이노(猪飼野)라 불렸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대부분 한국 관련 전문점입니다. 현재 K-POP 굿즈 숍과 한국식 카페로 활기 찬 젊음의 거리가 되어 있습니다. 한편, 누가 봐도 자이니치 코리안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반찬을 만들어 파게 틀림 없어 보이는 가게가 있는가 하면, 한편에는 한국에서 한순간 유행했다가 이미 사라진 간식이 팔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종로 같은 구시가지 같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홍대 앞처럼 요란하며, 어떨 때는 보통의 오사카 거리와 같은 이곳은 오래된 필름들을 한 곳에 겹쳐 올려놓은 듯한 인상이 들더군요. 도쿄의 코리안타운인 신오쿠보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혼재된 시간성입니다.
돼지를 뜻하는 猪
사육을 뜻하는 飼
들판 野입니다.
예로부터 일본에서 돼지는 제사, 공물, 귀족의 식재로 ‘관리되던 생명’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이전에 방문했던 코리안들의 집단 거주지, 교토의 부락지구도 본래는 가족, 도살, 염색, 사체 처리를 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피와 죽음에 관련된 공간이 항상 도시의 경계지대에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어쩐지 이 이름은 도시를 뒷받침하는 또다른 땅으로서 지어진 것 같습니다. 위험 노동 밀도가 높고 낮은 물가를 지닌, 멸시 받는 땅은 근대를 거쳐 이주민이 유입되는 지역으로 변해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식민지 출신들이 일본 내에서 집단 거주지를 형성한 장소들은, 그 훨씬 이전부터 축적된 차별의 역사가 겹쳐진 땅이 많습니다.
그런 땅이 이제는 야키니쿠 이외에는 돼지와 그다지 큰 상관이 없어보입니다. 골목마다 다르게 흘러나오는 K-POP과 한국 스타일 패션을 한 사람들이 채우는 문화의 거리에서, 이카이노라는 이름은 얼핏 잊힌 과거처럼 느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살고 있는, 한국 문화가 좋아 이곳을 찾는 젊은이들은 이카이노라고 불렸던 시대와 조금도 살아온 시간이 겹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쿠노 코리안타운의 한 골목에 역사자료관이 생겨 방문했습니다.
4.3 때 오사카로 피난 온 수많은 제주 사람 중 한 명인 홍여표 씨가 2003년에 세운 한일문화교류시설이 기원입니다. 그리고 2023년,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료관에는 1910년대의 지도부터 최근 사진에 이르기까지 이 거리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마을의 시작점이 되는 기록은 1903년 제주 해녀의 도항 기록입니다. 제주 해녀는 이제서야 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제주의 바다에서 생계를 지키며 멸시 받아온 여성들이지요. 잦은 흉년과 수탈 구조, 그리고 식민지 시기 해산물 유통 독점 속에서 해녀들은 바다를 건너 원정 물질에 나서게 됩니다.
이후 오사카에는 제주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큰 규모의 조선인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4.3사건 유족들까지 합류하게 됩니다.
1920년대에는 주소에 ‘일본국 이카이노’라고만 적어도 한반도로부터 편지가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주에서 밀항한 가족을 편지를 보내 찾은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동네 사람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던 시대이니 한 지역에 모여 살면 가능했을 수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은 동네 인구 통계까지 보고 나니 어쩐지 얼핏, 저도 할머니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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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타운 전시관 내부는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으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야 K-POP이 흘러나오는 현재와 해녀가 밀항한 땅은 너무 멀어보입니다.
전시장에는 행정 구역의 변화, 조선총련과 한국민단의 분리, 특별영주권법이 시행 이후의 기록, 본명과 일본명이 혼재된 주소 사진, 마을 축제의 풍경 사진 … 등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너무나도 ‘객관적인’ 자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뮤지엄과 아카이브는 중립적인 기억의 저장소라기보다, 무엇이 기억으로서 인정될 가치가 있는가를 가늠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료관 – 즉 일종의 ‘뮤지엄’이 된다는 것은 공적 인정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모인 자료들은 너무나 명백한 얼굴을 한 것들이어서 오히려 간절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아카이브는 기억하기 위한 통로입니다. 그리고 ‘아카이브를 만든다’는 것은, 이것이 적어도 어떤 개인 혹은 집단에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러한 자료관을 세우는 일을 멈추지 않는 모양입니다. 어떤 이에게 중요한 사료가,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역사가 보편적 대표성을 부여 받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보통 이런 자료관들은 일본의 박물관법에 해당 되지 않는 시설로서 운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공적 기관으로 속하지 않음으로 인해 마을의 커뮤니티의 성격과 정치적 자율성을 획득하는 한편, 그 운영에 있어 어려움도 떠안습니다. 정식 학예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료의 보존, 관리에 있어서의 전문성이 부재하는 경우도 있고, 노동력 역시 봉사활동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자료가 있어도 방치될 수 없는 양이 항상 발생합니다. 정식 뮤지엄에 비해 많지도 않은 자료들이 그 마저도 계속 선별되어야 하지요.
뮤지엄은 공동체가 겪어온 시간들을 재는 저울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숫자에 나타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기록의 부재는 단지 과거가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가 과거와 관계 맺을 수 있는 감각의 통로가 차단되는 일입니다. 과거와 현재 사이의 거리는 단순히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떤 감각적 매개를 통해 접속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나는 이러한 자료관들이 제도적 역사 바깥에서 상상의 기억이 머물 수 있는 한 가지 형식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완의 뮤지엄에는 저울이 고장나 있어서 오히려 무엇이 그 위에 올려지지 못했는지를 반복해서 상기시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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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관에 왔으니 니시나리로 가기 전에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요.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에 유학한 초기에는 특히 제국주의 비판과 기록의 윤리를 작업으로 다룬 일본의 여성 작가들에게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가령 남편과 함께 32년간 원폭의 그림을 그려온 마루키 토시에 대해서 석사 논문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쓰기도 하였지요. 마루키 부부는 당시에 언론이 기록하지 않던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미군병사나 한복을 화면에 등장시키는 등, 거기서 또 한 번 누락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조선반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으로서 제국주의에 대해 생각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작가들을 처음 만났을 때 실은 작품보다 더 큰 충격 받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서도 밝힌 적 없는 아주 사적인 놀라움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작가들에게 20세기 초 사진이, 얼굴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의 외할머니의 사진은 모두 1980년대에 이르러 컬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30년대생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개인의 이미지 역사에서 50년이 누락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증조 할아버지의 얼굴은 그림으로도 사진으로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식민지 지배를 바탕으로 한 산업 발전 속에서 이미지 대국이 된 역사가 있습니다. 반면 당시 조선인들에게 카메라는 개인의 물건이라기보다 일본인 관리, 군인, 신문사의 도구로, 개인이 사진기를 소유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이미지를 기록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은 역사를 자기 시선에서 기억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기록 없이 기억을 증명해야 하는 세계관에서, 우리는 믿을 수 있을까요?
기록이 없는 기억을 이어 나가는 것은 가능할까요?
어딘가
니시나리는 오사카에서 오래 전부터 ‘문제 지역’으로 불려온 동네입니다. 니시나리는 흔히 전후 일본의 빈곤, 노동 문제, 폭동의 역사로 요약됩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마주한 것은 조금 다른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니시나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니시나리구는 메이지 시대까지만 해도 농촌지대였습니다. 이 동네가 왜 이렇게 문제적 얼굴로 표상되게 되었는지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우선 텐노지 바로 옆에 있는 ‘신세계’와 그 중심에서 빛나는 스텐카쿠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마침 방문했을 때, 밤의 스텐카쿠에는 2025년 오사카 박람회를 축하하는 메시지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1903년의 내국권업박람회까지 포함하면 오사카는 총 세 번의 박람회가 열린 곳입니다. 1903년, 그러니까 제주 해녀가 도항했다는 츠루하시의 첫 기록과 같은 바로 그 해, 이 자리는 근대 일본이 최신 기술을 선보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인류관’이라는 이름 아래 아이누, 조선인, 중국인, 오키나와인들이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타코야끼, 쿠시카츠, 이자카야와 빠칭코, 메가 돈키호테의 거대한 간판으로 혼란스러운 ‘신세계’이지만, 박람회 직후 ‘신세계’는 그 이름처럼 회전목마, 케이블카, 음악당, 폭포 계곡과 같은 아름다운 호화 시설로 채워진 서구 모방의 성공 모델이었습니다.
패전 후 일을 구하기 위해 더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복구기 동안 급증한 노동 수요 속에서 바로 맞은 편의 니시나리구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1인 단신 가구를 위한 요세바가 빽빽하게 들어섰고, 아직도 니시나리의 아이린 지구는 이러한 요세바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박람회, 1970년 오사카 엑스포가 열렸습니다. 아시아 최초라는 세계적 대규모 개발과 건설 노동이 집중되며, 일용직 노동자들이 더욱 밀집하였고 저렴한 노동 물가가 형성되었습니다. 일본의 성장 그늘 속에서 이 지역은 노동 문제로 지속적 충돌을 겪으며 ‘빈민가’, ‘치안이 좋지 않은 위험한 장소’라는 별명으로, 화려함을 떠받치는 공간으로서 밀려나듯 자리잡아갔습니다.
이전까지 가마가사키로 불리던 이 지역은 ‘아이린 지구로 명칭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이곳의 사람들은 이전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이자카야에서 환각제를 팔지 마라!”,
“일본인은 원점으로 돌아 가라! 의리와 인정을 잊지 마라!”라고 적혀 있다.
사실 내가 니시나리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믿는 선생님이 코코룸을 꼭 가보아야 할 곳으로 소개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생님과 함께 이곳에 왔습니다. 오사카에서 오래 자란 내 친구 중 한 명은 단 한 번도 이곳에 와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신뢰를 빌려서 들어왔습니다.
이번 오사카 방문에서는 코코룸에서 숙박하고 함께 먹고 생활했습니다.

코코룸,
생각보다 찾기 어려웠습니다.
상점가에 있기 때문에 가까이까지 가는 것은 수월했지만, 게스트하우스’같은 입구가 아니라, 물건들을 늘어놓은 좌판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 앞을 조금 서성였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중고 물품들이 놓여 있습니다. 옷도 있고, 컵도 있고, 책도 있고, 장식물도 있습니다. 뭔가…다 있습니다. 정확히 무엇을 하는 장소인지 한 눈에 알기 어려웠습니다. 카테고리화 되지 않고 그냥 있는’ 이곳이 뭔가를 효율적으로 남기거나 교환하기 위한 곳은 아니라는 인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몇 번을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여기?
코코룸이라는 글자를 발견하고 들어가게 됩니다.
들어가면 테이블.
카페?
근데 게스트 하우스.
근데?
다 같이 밥을 차려 먹는다.
그런 곳입니다.
정원도 있고, 우물도 하나 있습니다. 우물은 이곳을 지을 때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코코룸은 2003년 신세계 내의 카페처럼 등장해 2008년 가마가사키로 이동하면서 23년간 운영되어 왔다고 합니다. 2003년 당시의 이름은 ‘목소리와 언어의 자료실 코코룸 (こえとことばの資料室 ココルーム). ‘코코룸이라는 이름 외에‘가마가사키 예술대학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대학은 아닙니다. (진짜 대학이 뭐죠?)
코코룸에서는 매일 스텝들과 방문객들이 힘을 합쳐 식사를 준비하고, 함께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합니다. 마침 주변에서 오사카간사이국제예술제가 열리고 있어서 여기서 머물면서 전시도 보고 레지던시를 하고 있는 베트남 작가도 만났습니다.
신청한 사람에 한해서 운영자인 카나요상에 의한 니시나리 투어, 이른바 가마가사키 아트 투어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아래는 투어의 일부를 사진과 메모로 남긴 것입니다.

함께 먹을 준비를 하고 함께 치운다.
처음 방문한 내가 한 일은 젓가락 짝을 맞춰 인원에 맞게 놓기.



자전거 주차장을 개조해 만들었다.
의자, 방석, 천장 장식 모두 마을 주민들이 만든 것.
<벤치프로젝트> 등도 전개 중.



코코룸의 실내에도 한 작품 전시 되었고,
이곳 Café ATARIYA에서는 Production Zomia가 기획한 전시가 개최되었다.

투어 중에는 가까이에 있는 토비타신치(飛田新地)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1912년 오사카 남바 지역의 신치오토베 유곽이 화재로 소실된 후 이전되어온 이곳은, 1958년 매춘방지법 시행 이전까지 대규모 유곽(22,600평)이었습니다. 일본은 에도 시대부터 공창 제도를 통해 성판매를 관리해왔고, 토비타신치는 그러한 제도의 공간적 구현이었습니다. 당시 이 구역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허가된 장소로만 입장할 수 있었고, 많은 여성들이 계약 관계로 묶여 외부 이동이 제한되었습니다. 이는 성판매 공간을 주거 공간과 분리하려는 관념의 결과처럼 보였습니다.
현재 일부 가게는 요정(料亭)의 형태로 영업을 지속하고 있지만, 카나요 상은 이곳의 여성들이 또 다른 삶의 표현과 돌봄 관계를 찾는 전환의 과정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마가사키와 토비타신치는 도보권에 있지만, 단순한 지역적 인접성보다는 노동과 성의 관점에서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토비타신치는 단순한 성적 소비의 공간이 아니라, 일일 노동 이후의 접촉과 인정, 환영을 제공하는 장소로서 기능했을 것입니다. 노동자가 다시 노동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한 감정적·육체적 재생산의 장치입니다. 이 두 구역은 그렇게 노동 시스템 속에서 상호보완적으로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토비타신치 구역을 격리하던 벽이 있던 흔적이 보인다.
니시나리, 특히 가마가사키는 일본 최대 규모의 일용 노동자 집결지로 기능하며 고도성장기 일본의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에도, 그 개별적 삶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름 없는 통계, 혹은 ‘문제 지역’이라는 표상으로 남았을 뿐입니다. 노동은 도시를 작동시키는 핵심이지만, 노동자의 생은 제도적 아카이브에서 누락되기 쉽상입니다.
코코룸의 운영은 우에다 카나요(上田假奈代)상과 스텝(인턴과 봉사활동자)들이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카나요 상은 시인입니다.
나는 시 쓰는 여자들을 조금 압니다.
문예창작과를 나왔고, 친구들도 시인이고,
시인들에게서 글도 배웠으니까.
여자 시인들 특유의 아픈 너그러움 같은 게 있습니다.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만, 나는 그런 종류의 너그로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 너그러움은, 너그럽고 또 너그러워서 본인은 행복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면 마음이 조금 쓰이는 그런 종류의 너그러움입니다.
카나요 상은 코코룸에서 “표현”과 관련한 기획들을 이어가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표현해야 한다(生きるためには表現だ)”라는 슬로건 아래 다양한 활동으로 사람의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표현”이라는 말은 해도 “시”라거나 “예술”이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시 쓰기를 강요하는 시인 중에 좋은 시인은 본 적이 없어서 그 점에서 나는 어쩐지 이 사람을 무척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코코룸의 로비에 앉아 있으면, 괜히 뭔가를 도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열려 있고, 역할은 없고, 의무도 없고, 그런데 이상한 책임감이 생기는 곳. 나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 쫓겨나지도 않습니다. 나는 거기 앉아 있어도 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장애를 가진 주민이 와서 혼자 말을 늘어 놓고 가곤 했습니다. 스탭들은 그의 말에 대답을 하면서도 건성건성 적당히 대답을 해주고 그렇다고 돌려보내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 계속 있어도 되게 두었고 그러다 돌아가겠다고 하면 인사를 해주었습니다. 무척 평화로웠습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돌본다, 그런 느낌도 아닙니다. 그저 같은 공간에 머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밥 때가 되면 다 같이 밥을 차려 먹고 치웠습니다.
코코룸에서 묵기 시작한 다음 날, 오랜만에 아는 작가님을 우연히 거기서 만났습니다. 오사카가 그렇게 넓은데 말입니다. 이 동네가 고립된 곳처럼 느껴졌던 만큼 그 우연은 이상했습니다.
이상하게 함께 방을 썼던 사람들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누가 먼저 나가고 들어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무도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왁자지껄 인사를 나눴던 것 같기도 합니다.
마지막 날에는 아이린 지구에서 유명한 삼각공원에 갔습니다. 아이린 지구의 삼각공원은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옛날, 폭동이 일어났다고 하는 유명한 중심 장소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니시나리를 찾는 유튜버들이 늘어나면서 이 주변의 풍경이나 빈곤을 소재로 삼는 영상들이 반복적으로 생산되고 있습니다. 나도 그런 영상을 보았습니다. 노인들이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있고 자판기의 음료수가 100엔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수상할 정도로 숙박비가 싼 숙소들와 무료 급식소가 나오는 그런 영상입니다. 삼각공원을 중심으로 노숙자와 고령 노동자의 일상이 촬영 대상이 되면서, 주민들이 사진 촬영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여기에 오면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 휴대폰에는 삼각공원 주변의 사진은 한 장도 없습니다.
니시나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방식으로만 보이도록 소비되는 장소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가시화는 삶의 복잡성과 역사적 맥락을 드러내기보다는, ‘문제 지역’이라는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록과 이미지가 늘어날수록, 역설적으로 삶은 더 기록되지 않는 방식으로 남겨집니다.
나는 어느 유튜버 영상의 풍경에서 보았던 삼각공원의 테레비가 궁금했습니다. 유튜버들이 남긴 영상처럼 삼각공원 주변이 ‘정말로 그러한지’보다도, 이상하게 공원 한 가운데 전봇대처럼 테레비가 설치되어 있던 화면 속의 풍경이 강렬하게 기억의 잔상으로 남아있었습니다. 황량한 공원에 테레비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면서도 … 어쩐지 기억에 남았던 것입니다.
삼각공원에는 한 편에는 무대가 있고, 황토색 운동장과 나무들이 듬성듬성 공원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가마사키 예술대학 (코코룸)에서 1년에 한 번씩 이 무대에 공연을 올린다고 합니다. 나와 선생님들이 갔을 때 지붕이 너덜너덜한 무대 아래서 누가 자고 있었습니다. 운동장 한 가운데 티비도 있었습니다. 커버가 닫혀 있었습니다. 시간을 정해 가끔씩만 열려 있는 모양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알아보니 이런 뉴스가 있습니다.
니시나리·아이린 지구 ‘거리 텔레비전’ 부활… 지역 기업이 관리 인수
마이니치신문 2019년 4월 12일 19:49 (최종 업데이트 22:54)오사카시 니시나리구 아이린 지구에서 반세기 이상 노동자들의 오락으로 사랑받아 온 ‘거리 텔레비전’이 12일 약 1년 만에 부활했다. 지난해 3월 고장 나면서 오사카부 경찰 니시나리서가 철거를 검토하는 등 존속이 불투명한 상황이었으나, 지역 기업이 관리를 인수해 새로운 텔레비전을 설치했다.
공원의 나무 밑에서 몇 사람이 고기를 굽고 있었습니다. 맛있는 냄새가 났고 일본의 공원에서 그런 장면을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지저분한 옷을 입고 약해 보이는 사람들이 웃으면서 고기를 먹고 있었습니다 한 흑인 남자가 우리를 보자 요란하게 손을 흔들며 “헤이, 웨어 유 프롬!” 하고 소리쳤다. 그가 너무 환하게 웃어서 이가 빠진 잇몸이 훤히 들여다 보였습니다. 잠깐 대답할까 망설이다가 살짝 미소만 보이고 지나쳤습니다. 그게 맞는 반응이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 동네가 나를 밀어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조심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한편 니시나리는 지역 고령화와 외국인 이주민의 유입으로 인해 새로운 변화점도 맞이하고 있습니다. 최근 중국식 종교 건물이 생겼고,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들이 이 지역에 유입되어 기존 거주자들과 어울어져 살고 있습니다. 내가 아이린 지구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 동네에 한센병을 앓던 사람들이 자주 놀러왔다고 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그들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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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루하시에서는 누군가 남기려 했던 기억들이 제도의 언어로 공백과 함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무엇이 수집되었는가, 무엇이 전시되었는가, 무엇이 빠졌는가. 니시나리에서는 아무도 남기려 하지 않은 삶들이 그냥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떤 기억들은 제도적 전시로 포섭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현재형으로 남습니다. 그것들은 설명되거나 해석되기보다는, 반복되는 행위, 말해짐, 관계 맺기, 몸의 습관과 리듬 속에서 지속됩니다. 이러한 기억은 박제되지 않고, 언제나 다시 발생하며, 완결되지 않은 상태로 머물고 있습니다.
나는 이 두 장소에서 같은 질문을 두 번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떤 기억 앞에서 말해도 되는 사람인지. 내가 쓰는 말. 내가 하는 생각.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누가 기억될 자격을 얻고, 누가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요?
나는 여전히 내가 어떤 기억 앞에서 말해도 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얼굴들과 이름 없는 통계, 아무도 남기지 않는 삶 사이에서 종종 망설이게 됩니다. 다만 츠루하시와 니시나리에서 기억이 제도 안으로 들어갈 때 무엇을 잃는지와 제도 바깥에 머무를 때 무엇을 지키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내가 알지 못하는 할머니의 이름도 놓여있을 것 같습니다. 할머니의 어떤 시간은 아무 기록도 없습니다. 제도도 없습니다. 공적 언어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한테서는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도 있어본 적 없는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가능할까요.
이상하게도 나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들에 점점 더 붙잡히게 됩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기억이 소중해진다는 것.
이 글은 무언가를 남기기 위한 기록이라기보다 기억 어딘가에서 멈춰 본 것에 가깝습니다.
어떤 삶은 도착만 남고 또 어떤 삶은 처음과 끝은 모른 채 경유만 합니다.
코코룸에서는 아침마다 아케이드 상점가로 나와서 아침 체조를 했습니다. 누군가 코코룸을 위해 만들었다는 노래를 틀고 마주보면서 팔 다리를 뻗고 제자리에서 콩콩 뛰거나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이를 지나치면 인사했습니다. 나는 이 기억이 가장 좋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외부인이라는 느낌이 조금 덜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이 기억이 가장 좋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냥 인사해서.
생각보다 아이린 지구는 한산했습니다.
밤에는 무서웠습니다.
오래 전에 내가 본 혹은 누군가들의 깜깜한 바다처럼.
끝.